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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념 자료집 제1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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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상거래 상품정보 제공 고시
          도서명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저자, 출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크기 15.2×22.5cm
          쪽수 392
          출간일 2020-12-31(개정1판)/1996-07-05(초판)
          출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고객평가 0건  ★★★★★ 0/5
          엮은이 한국교회사연구소
          출간일 2020-12-31(개정1판)/1996-07-05(초판)
          페이지 392
          규격 15.2×2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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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건 탄생 200주년 기념 자료집 제1집『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은 기존의 판독 오류와 잘못 표기된 한자어 및 지명을 바로잡고 주석을 보완하는 등 그간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반영해 개정하였습니다. ❞


          올해 희년의 주제는 “당신이 천주교인이오?”입니다. 이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옥중 취조 때 받으셨던 물음으로, 김대건 신부님은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이 응답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에는 이처럼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사제로서, 선교사로서 불꽃처럼 살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그분의 정신과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 염수정 추기경 축사 中에서


          ◎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념 자료집 제1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개정판”(392쪽, 2만 원)을 펴냈습니다.


          본 연구소는 지난 1996년 성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 권의 ‘전기 자료집’을 간행한 바 있습니다.


           제1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제2집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제3집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로 구성된 이 전기 자료집은 지난 25년 동안 성 김대건 신부님과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주요 자료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본 연구소는 올해 뜻깊은 희년(禧年)과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 인물’ 선정을 기념하면서, 제1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을 필두로 그동안 축적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차례대로 개정판을 간행하고자 합니다.


           순교 150주년 기념 초판 제1집은 성 김대건 신부님이 생전에 작성하신 21통의 서한*(1842년 2월~1846년 9월) 가운데 현존하는 19통의 서한과 리브와(N. Libois) 신부에게 보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집대성하여 판독한 탈초(脫草)본과 이를 꼼꼼하게 대역(對譯)한 번역본으로 편찬한 자료집입니다.


           초판 제1집은 본 연구소 설립자 故 최석우(안드레아) 몬시뇰의 책임 감수 하에, 故 최승룡(테오필로) 신부님과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님이 라틴어 판독 및 번역을, 故 배세영(마르첼리노) 신부님과 최석우 몬시뇰이 프랑스어 역본의 판독 및 번역을 맡으셨으며, 차기진 전 연구실장이 해제와 주석을 작성하였습니다.


          ‘희년 기념 개정판 제1집’에서는 기존의 판독 오류와 한자어 오기를 최대한 바로잡고 지명을 추가했으며 주석을 보완 작성하였습니다. 아울러 일반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본과 탈초본을 별도로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연구자들의 원문 대조 연구를 지원하고 DB 활용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하여 연구소 홈페이지(www.history.re.kr)에 ‘탈초본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 수록 자료와 소장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념 자료집” 제1집으로 펴내는 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은 순교 150주년 기념으로 1996년에 펴낸 바 있는 서한집에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개정 출판한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현존하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을 모두 수집한 뒤 원본을 판독하여 꼼꼼히 번역하였고, 필요한 부분에는 각주를 달아 서한을 집대성하였었다. 제목에는 그 주된 내용이 되는 ‘서한’이란 명칭을 붙였지만, 그 안에는 다른 기록 즉 ‘1845년 3~4월에 서울에서 작성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서한은 현존하는 것과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합쳐 모두 21통인데, 두번째 서한(1842년 5월경 주산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올린 서한)과 열다섯 번째 서한(1845년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 뒤 예수회의 고틀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은 유실되어 현재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책자에 수록한 서한 수는 모두 19통이 된다. 김대건 신부는 이 19통의 서한을 대부분 라틴어로 작성하였지만, 아홉 번째 서한(1844년 12월 15일 몽골의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서한)은 한문으로, 마지막의 스물한 번째 서한(일명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회유문’)은 한글로 작성하였다. 이 중 스물한 번째 서한은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1885년에 로베르(P. Robert, 金保祿) 신부가 필사한 사본만이 절두산 성지 내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아홉 번째 서한과 스무 번째 서한(1846년 8월 26일 옥중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서한)은 프랑스어 역본만이 남아 있다. 즉 아홉 번째 서한은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정리 번호 vol. 1261, f. 63~74’로 소장되어 있었으며, 스무 번째 서한은 페레올(J. Ferréol, 高) 주교의 1846년 11월 3일 자 서한(정리 번호 vol. 577, f. 961~971)에 첨부되어 있다. 아마도 그 라틴어 원본들은 페레올 주교가 직접 간직하려 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후의 잇따른 박해로 결국 유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페레올 주교는 위의 11월 3일 자 서한에서 그가 김대건 신부로부터 서한을 받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공소 방문을 평온한 가운데 끝냈는데 그때 원수들이 와서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패자도 있었고 승자도 있었습니다. 승자 중에는 그 첫머리에 본방인 사제 김 안드레아가 있습니다. 그는 현재 나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의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황해도 해안으로 보냈었습니다. 거기에는 해마다 봄이면 아주 많은 중국 배들이 고기잡이를 하러 옵니다. 김 신부는 이 장소들을 방문하여 서한을 전달하고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해 중국인들과 연락할 방법을 검토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임무가 무사히 끝났을 때 그는 뜻밖의 사건으로 체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아래 서한에서 그가 잡힌 경위와 칼 아래 그의 머리를 숙이기까지 받아야 했던 형벌의 일부를 직접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한의 원문은 라틴어였습니다.”


           김 신부의 서한을 소개한 다음에도 김 신부의 약전, 김 신부의 순교,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임군집(林君執, 요셉) 등 그 밖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나긴 페레올 주교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것이 이른바 페레올 주교의 「병오일기(丙午日記)」(1846년 11월 3일 자 편지에 포함된 병오박해 순교자 9위의 행적)이다. 한편 리브와(N. Libois) 신부에게 보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두 번째로 귀국하여 서울의 돌우물골[石井洞]에 있을 때, 현석문 등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라틴어로 작성한 것이며, 열여섯 번째 서한(1845년 7월 23일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첨부되어 있다. 다만 그 명칭은 본 자료집에서 붙인 것으로, 본래의 보고서에는 부분마다 ‘조선 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진상’,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 등의 제목들이 붙어 있다. 이 보고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보고서로, 여기에는 조선 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와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로, 여기에는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P. Maubant, 羅伯多祿) 신부, 샤스탕(J. Chastan, 鄭牙各伯) 신부,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등 모두 33명의 순교자에 대한 약전이 서술되어 있다. 이 중에서 김 루치아는 이름만 수록되어 있는데, 편지 원문에 13쪽(v.p.13)이라고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만물집 딸’ 김 루치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초판본에서 김 루치아를 김장금 안나로 본 것은 『기해일기』의 순서로 볼 때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3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행적을 보고하는 부분에서, 앵베르 주교의 약전 다음에는 순교에 관한 묘사와 조선의 형벌·감옥·재판에 대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 서한 가운데 흥미로운 삽화가 그려진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또 김대건 부제가 보고서 끝부분에서 “이번에는 여기까지 적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볼 때, 훗날 다른 순교자들에 관한 전기도 작성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1846년의 병오박해로 순교하면서 더 이상의 전기를 작성할 수는 없었다. 현재까지 김대건 신부의 서한으로 알려진 21통 가운데 2통은 유실되었고, 라틴어로 쓴 16통의 서한과「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모두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정리 번호 vol. 577과 vol. 1261)에 소장되어 있었다. 동 고문서고에서는 이 서한들과 보고서를 다른 자료들과 함께 자료집 형태로 묶어 두었는데, 1984년에 그 일체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로 이관하였다. 그 이유는 이에 앞서 1983년 9월 27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천주교회 103위 시성을 승인하고, 이듬해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한다고 발표하자 이를 축하한다는 데 있었다. 이후 주교회의에서 이들 서한과 보고서를 다시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이관하여 현재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 작성 시기와 장소


          김대건 신부는 라틴어와 한문에 능통하였다. 그뿐 아니라 비록 세 번째 서한(1842년 9월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장상인 르그레즈와(P. Legrégeois) 신부가 프랑스어 공부를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842년에 통역자로서 프랑스 군함에 승선할 정도로 어느 수준까지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의 서한은 라틴어와 한문, 한글로만 쓰였다.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에 의하면, 마카오 본부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에게 여러 언어를 배우게 하고, 각종 사소한 일을 시키는 것이 학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라틴어와 모국어만 가르쳐야 한다고 건의하였다(1841년 11월 17일 자 파리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참조). 김대건 신부는 1842년 2월 15일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세실(J.-B. Cécille, 瑟西爾)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에리곤(l’Érigone)호에 승선하여 마카오를 출발한 이후 2월 28일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을 발송하였다. 현존하는 것 중에서는 바로 이것이 두 번째 기록이다. 이에 앞서 필리핀 롤롬보이에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라틴어 작문’ 답안지가 있으나, 내용상으로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번 자료집에서는 제외시켰다. 그리고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순교하기 직전인 1846년 8월 말에 옥중에서 조선 교회의 부감목(副監牧)으로서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서한을 부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록이 된다. 이 중 서한 21통의 작성 시기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842년에는 마닐라·주산(舟山)·상해에서 각 1통씩, 요동의 백가점(白家店)에서 2통 등 도합 5통을, 1843년에는 백가점에서만 2통을, 1844년에는 몽골의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만 2통을, 1845년에는 서울의 돌우물골에서 3통, 상해에서 5통,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1통 등 도합 9통을, 1846년에는 옥중에서만 3통을 작성하였다. 이 밖에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이 1845년 부제로서 귀국하였을 때 서울 돌우물골에 머물면서 작성한 것이다. 서한 작성처 중에서 요동의 백가점과 몽골의 소팔가자, 서울의 돌우물골은 김대건 신부의 행적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곳이다. 백가점은 요동 땅 태장하(太莊河) 인근의 교우촌으로, 훗날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 거점이 된 차쿠(岔溝) 이웃에 있었으며, 김대건 신학생이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머무르며 1차로 귀국을 시도한 곳이었다. 또 소팔가자는 1843년 4월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김대건이 훈춘(琿春) 여행을 준비한 곳이며, 1844년 12월 초까지 마지막 신학 공부를 마친 뒤 부제품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 돌우물골은 두 번째 조선 입국에 성공한 뒤 1845년 1월 15일에 도착하여 4월 30일까지 머물던 비밀 장소였다. 한편 1844년 12월 15일에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올린 아홉 번째 서한은 김대건이 부제로 서품된 뒤에 「훈춘 기행문」을 완성하여 한문 서한 형식으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것이다. 김대건은 이보다 7개월 전, 즉 1844년 5월 17일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여덟 번째 서한)에서 2월 5일에 소팔가자를 떠나 훈춘까지 가서 약 두 달 동안 조선의 동북쪽 입국로를 탐색한 뒤 4월 초에 돌아왔음을 보고하였다. 또 페레올 주교가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4년 12월 10일 자 서한(정리 번호 ol.579, f.196~198)에는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부제품을 주었다.”는 사실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 점은 페레올 주교가 그들에게 부제품을 주고 나서 기쁜 마음에 리브와 신부에게 이 사실을 밝힌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1844년 12월 10일 경에 부제품을 주었다.”고 설명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김대건은 그해 1844년 4월 초 훈춘 여행에서 돌아와 8개월 동안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부터 6품인 부제품까지 받았고, 그동안 틈틈이 이 서한(기행문)을 한문으로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


           ✜ 수취인
          김대건 신부의 서한 및 보고서를 받은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그중에서 김대건 신부의 스승 리브와 (Napoléon Libois, 1805~1872) 신부가 서한 12통과 보고서 1건을 받았고, 스승 르그레즈와(Pierre Louis Legrégeois, 1801~1866) 신부가 4통의 서한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페레올(Jean Joseph Ferréol, 高, 1808~1853) 주교가 4통의 서한을, 고틀랑(C. Gotteland, 1803~1856)·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張敬一, 1814~1866)·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李, 1808~1857) 신부가 1통의 서한을, 조선 교우들이 1통의 서한(회유문)을 받았다. 다만, 이 중에서 열아홉 번째 서한(1846년 7월 20일의 옥중 서한)은 수취인이 4명(베르뇌·메스트르·리브와·르그레즈와)의 명의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김대건 신부는 스승 신부에 대한 믿음과 공경심, 애정이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조선 교회의 장상이자 자신에게 사제품을 준 페레올 주교에 대한 공경 또한 자별하였는데, 이들 3명에게 보낸 서한은 사한(私翰)이자 공적인 보고서 즉 공한(公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열아홉 번째의 옥중 서한과 마지막 서한(회유문)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선배 선교사들과 조선 교우들에 대한 애정 어린 이별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대건 신학생이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의 대표는 르그레즈와 신부였다. 그는 1828년 초, 마카오로 건너와 이곳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부대표로 있다가 1830년부터 약 11년 간 대표를 맡게 되었다. 당시 대표 신부는 파리에서 파견되는 극동 선교사들의 임지를 정해 주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1837년에 조선 신학교를 임시로 대표부 안에 설립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도, 이후 신학생들의 의식주와 교육을 책임진 것도 바로 르그레즈와 신부였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신학교의 교장은 칼르리(M. Callery, 1810~1863) 신부가 맡았으나, 곧 르그레즈와 신부가 교장 겸 교수를 맡아 조선 신학생들에게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그 후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 포교지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고, 조선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또 마카오가 포르투갈 관할권(padroado) 교구였던 탓에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괴로움을 겪게 되자, 1841년에는 대표부를 영국 점령지인 홍콩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사재를 털어 그곳에 대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던 중 1841년 말에 파리 본부의 신학교 지도자로 임명되어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리브와 신부는 1837년 동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의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그 이후 부대표 겸 조선 신학교 교수를 맡아 라틴어·프랑스어·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1841년 말에 르그레즈와 신부가 프랑스로 귀국하게 되면서 대표를 맡게 되었으며, 이듬해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생이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조선 입국로를 탐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그는 르그레즈와 신부가 계획했던 대표부 이전 작업을 추진하여 1847년 초에는 이를 홍콩으로 이전하였으며, 10년 뒤에는 싱가포르에 또 하나의 대표부를 신설하는 일을 도왔고, 1864년에는 상해 대표부를 신설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가 1866년에 파리로 돌아갔고, 로마의 대표부 대표로 재직하던 중에 선종하였다. 그가 파리로 돌아가기 전까지 홍콩 대표부에 주어졌던 선교사 임지 선정 권한은 리브와 신부의 전임(轉任)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1840년 마카오에 도착한 뒤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만주로 건너가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엿보던 중 조선 대목구의 부대목구장(coadjutor)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1843년 초에 가서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칙서를 받고 이미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839년 9월 21일에 앵베르 주교의 순교로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을 승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는 1843년 12월 31일에 개주(蓋州) 양관(陽關)에서 만주 대목구장 베롤(J. Verrolles, 方若望, 1805~1878) 주교의 집전으로 성성식을 가졌으며, 1845년 8월 17일에는 상해에서 김대건의 사제 서품식을집전하였다. 그리고 김 신부의 안내를 받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53년 2월 3일에 과로로 선종하였다.메스트르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1840년에 동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9월 21일 베르뇌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도착, 임지를 기다리는 동안 대표부 일을 도와주면서 조선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1842년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자 김대건과 행동을 함께하면서 틈틈이 신학을 가르쳤고,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최양업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서양인인 탓에 발각될 것을 염려하는 조선 밀사들의 권유로 오랫동안 입국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852년에서야 입국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853년에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한때 조선 포교지의 장상직(pro-vicarius)을 맡았고, 1855년에는 제천 배론(舟論, 지금의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신학당을 건립하였다. 그 후 충청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857년 12월 선종하였다. 고틀랑 신부는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로, 1773년에 해산되었던 예수회가 1814년에 부활하면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원들의 장상이었다. 이후 그는 강남교구장 베시(L. Bési, 羅類思, 1805~1871) 주교에 의해 강남 교구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는데, 1845년에는 김대건 부제 일행이 서울을 떠나 상해에 도착하여 도움을 청하자 그가 묵고 있던 중국인 교우 집으로 찾아와 필요한 비용을 대주었다. 그런 다음 교우 집이 위험할까를 염려하여 김대건 부제 일행에게 다시 배로 가도록 하고, 배 안에서 김대건 부제를 비롯하여 조선 교우 11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해 주었다. 베르뇌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1840년에 동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9월 21일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임지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 신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쳤고, 1843년부터 12년 동안은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854년 12월 27일 만주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고, 1853년에 페레올 주교가 선종한 후 메스트르 대목구장 서리(pro-vicarius)에 이어서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다시 임명됨으로써 이듬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옥중에서 작성한 서한에 베르뇌 신부의 이름이 나타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만주에 있을 당시에 이미 그를 만나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베르뇌 신부는 약 10년 동안 조선 교회를 위해 활동하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며,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한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을 받은 사람 중에서 특별히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김대건 신부는 동료인 최양업 신부에게 따로 서한을 보낸 적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옥중에서 쓴 열아홉 번째 서한에서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 있게. 이후 천당에서 서로 만나기로 하세. 그리고 나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보호하여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라고 한 구절을 통해 동료이자 친척이던 최양업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최양업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뒤인 1849년 4월 15일에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3일에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861년 6월 15일 과로로 선종하였다.


           ✜ 사료적 가치와 자료집의 의의
          김대건 신부의 서한은 그의 생애와 활동 내용, 신심과 업적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된다. 또 서한 내용에 나타나는 1842년부터 1846년까지의 사실들, 즉 조선 입국로 개척의 역사, 조선 교회의 상황과 정치 현실, 귀국과 체포, 순교 등은 곧 한국 천주교회사 그 자체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 그리고 조선 선교사로 활동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신부의 활동사도 이 서한들을 통해 보완될 수 있다. 일찍이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하면서 김대건 신부의 서한 가운데서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인용된 서한보다는 인용되지 않은 서한들이 많았으므로 이 자료집을 통해 그 책의 많은 부분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자료집을 통해 기존에 출간되었던 『김대건의 서한』(정음사, 1975)에서 누락되었거나 판독상의 오류로 잘못 이해되고 있던 여러 가지 내용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 한 예로, 본 자료집에서 기존에 25통으로 생각되어 오던 서한 수를 모두 21통으로 바로잡은 것을 들수 있다. 왜냐하면 김대건 신부가 1845년 3월과 4월에 작성하여 1845년 7월 23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발송한 보고서는 서한으로 볼 수 없으며, 1846년 8월 29일 자의 서한 또한 별개의 서한이 아니라 1846년 8월 26일 자 서한에 덧붙인 ‘추신’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김대건 신부의 저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다만 이 자료들은 그 자신이 직접 수집한 것이 아니라 현석문과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등이 수집하여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이 보고서 중에서도 ‘조선 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는 훗날 최양업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들의 행적」이나 그 후에 완성된 『기해일
          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김대건 신부 자신의 순수한 저작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보고서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과 순교자들의 전기 즉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은 일단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최초의 정리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내용에는 훗날 최양업 신부가 번역한 전기나 『기해일기』의 내용과 상이한 점이 나타나는데, 이는 김대건 신부의 기록 이후 그 내용들이 보완되거나 수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그상이한 점들을 찾아 검토하는 작업도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정판 | 간행사·축사
          초 판 | 간행사·축사


          해제 • 25
          일러두기
          김대건 신부 연보
          김대건 신부 가계도


          한글 번역문 • 47
          첫 번째 서한
          두 번째 서한
          세 번째 서한
          네 번째 서한
          다섯 번째 서한
          여섯 번째 서한
          일곱 번째 서한
          여덟 번째 서한
          아홉 번째 서한
          열 번째 서한
          열한 번째 서한
          열두 번째 서한
          열세 번째 서한
          열네 번째 서한
          열다섯 번째 서한
          열여섯 번째 서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열일곱 번째 서한
          열여덟 번째 서한
          열아홉 번째 서한
          스무 번째 서한
          스물한 번째 서한(마지막 회유문)


          라틴어·프랑스어 판독문 • 239
          1~16
          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
          17~20


          마지막 회유문 • 378


          색인 • 383



          성 김대건 바로 알기 /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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